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이유, 게으름이 아닐 수도 있다
해야 할 일은 분명히 많은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청소도 해야 하고, 밀린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수없이 떠올리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잠깐 확인하고, 영상을 하나 보고,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버립니다.
그제야 밀려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빨리 시작하면 되는데 왜 자꾸 미루는 걸까?”
그런데 이런 행동이 반드시 게으른 성격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일을 미루는 행동을 단순한 시간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 조절과 관련된 문제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시작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왜 시작하기 어려워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할 일이 많을수록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예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해야 할 일이 세 가지라면 각각의 순서를 정하고 시작하기가 비교적 수월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해야 할 일이 스무 가지라면 어떨까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방 청소하기’라는 계획보다 ‘책상 위 물건 다섯 개 정리하기’라는 계획이 시작하기 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자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판단해야 하지만, 후자는 다음 행동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의 양뿐 아니라 그 일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는지입니다.
2. 미루는 습관은 시간보다 감정의 문제일 수 있다
심리학자 푸시아 시로이스(Fuschia Sirois)와 티머시 파이칠(Timothy Pychyl)은 2013년 발표한 논문에서 미루는 행동과 단기적인 감정 조절 사이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미루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일을 시작하면서 느끼게 될 불편한 감정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요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보고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 제대로 작성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부담감
-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
-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이때 스마트폰을 확인하거나 다른 쉬운 일을 하면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회피 행동이 즉각적인 안도감을 준다는 점입니다.
해야 할 일을 미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당장의 부담은 조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남은 일은 그대로이고 마감은 더 가까워집니다.
결국 불안감이 커지면서 다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3.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시작을 방해한다
미루는 습관은 완벽주의적인 생각과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부터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첫 단계가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블로그 글을 작성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 하나를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기 전에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제목부터 완벽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블로그보다 좋은 정보를 담아야 하는데.”
“사진도 준비하고 내용도 충분히 조사해야겠어.”
이런 생각이 쌓이면 글을 작성하는 행동보다 완벽한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높은 기준을 갖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부터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행동을 미루게 될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준을 무조건 낮추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시도를 최종 결과와 구분하는 일입니다.
초안은 완성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줄이면 시작하기가 조금 더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4. 쉬운 일만 하면서 바쁜 척하는 이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갑자기 책상 정리를 시작하거나 이메일함을 정리한 경험은 없으신가요?
분명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업무는 시작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행동은 부담스러운 일을 피하면서 상대적으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에서 성취감을 얻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책상 정리는 결과가 즉시 눈에 보입니다.
반면 보고서 작성이나 시험공부는 오랫동안 집중해야 하고 결과도 즉각적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당장의 성취감을 느끼기 쉬운 활동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리나 준비 활동이 회피 행동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이 본래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불편한 일을 시작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반복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5. 일을 미룰수록 더 하기 싫어지는 악순환
미루는 행동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월요일에 해야 할 일을 금요일까지 미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월요일에는 비교적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금요일에는 마감에 대한 압박까지 더해집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귀찮았던 일이 점점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여기에 자신을 비난하는 생각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나는 왜 맨날 이럴까?”
“이번에도 결국 제대로 못 했어.”
이러한 자기비난은 행동을 바꾸기 위한 동기를 제공하기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함께 쌓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루는 습관을 바꾸려면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뿐 아니라 일을 대하는 감정과 생각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법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 번째, 해야 할 일을 최대한 작게 나누기
‘오늘 운동하기’보다 ‘운동복 입기’처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누어 보세요.
‘블로그 글 작성하기’ 대신 ‘제목 세 개 적기’부터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작은 행동을 정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 5분만 해보기
처음부터 한 시간 동안 집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보다 5분만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5분이 지나면 계속할지 다시 결정해도 괜찮습니다.
핵심은 반드시 5분 이상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언제 시작할지 구체적으로 정하기
‘오늘 저녁에 공부해야지’라는 계획은 다소 모호합니다.
대신 다음과 같이 정해 보세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정리한 뒤 책상에 앉아 영어 단어 다섯 개를 외운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특정 상황과 행동을 연결하는 계획을 실행 의도(Implementation Intention)라고 부릅니다.
실행 의도는 목표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략으로 연구되어 왔습니다.
네 번째, 모든 일을 오늘 끝내려고 하지 않기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해 보세요.
할 일을 줄이는 것은 무조건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중요한 곳에 배분하는 과정입니다.
다섯 번째, 자신을 비난하기 전에 원인 확인하기
일을 미루었다고 해서 곧바로 자신의 의지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세요.
“이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실수할까 봐 걱정되는 걸까?”
“정말 휴식이 필요한 상태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멈춰 있는 걸까?”
원인에 따라 필요한 해결 방법도 달라집니다.
피로가 심하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수 있고, 일이 너무 복잡하다면 작은 단계로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7. 게으름과 휴식이 필요한 상태는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모든 상황을 미루는 습관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수면이 부족하거나 과로가 누적되어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나 심리적 어려움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이전에는 어렵지 않게 하던 일까지 오랫동안 시작하기 힘들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다면 단순한 습관 문제로만 여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충분한 휴식과 생활환경의 조정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볼 수 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는 것만큼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8. 중요한 것은 의욕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는 환경
우리는 종종 의욕이 생겨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일 같은 수준의 의욕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욕이 충분하지 않은 날에도 시작할 수 있도록 환경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책을 읽고 싶다면 책을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운동하고 싶다면 운동복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작게 나누고 첫 번째 행동을 정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번 미뤘다고 해서 모든 계획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하지 못한 일을 오늘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겠다는 결심보다 가장 작은 일 하나를 시작하는 행동이 더 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 하나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dp001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