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찍은 사진을 보다 보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진 속에는 분명 내가 있습니다. 가족과 여행을 갔고, 생일 케이크 앞에서 웃고 있고,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너 그때 여기 정말 좋아했잖아”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머릿속에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기도 합니다.
반면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의 일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도대체 어린 시절 기억이 잘 안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모두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 거의 없는 이유
대부분의 성인은 생후 몇 년 동안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인지과학과 심리학에서는 어린 시기의 개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을 성인이 된 뒤 잘 떠올리지 못하는 현상을 유아기 기억상실(Childhood Amnesia 또는 Infantile Amnesia)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몇 살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또 어린아이에게 기억 능력이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이들도 사람과 장소를 기억하고 학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구체적인 개인적 사건의 형태로 남아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울까요?
어린아이의 뇌도 계속 발달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기억과 관련된 뇌의 여러 영역과 기능이 계속 발달합니다.
특히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하나의 경험으로 구성하고 장기간 기억하는 능력 역시 성장하면서 변화합니다.
성인은 “지난여름 제주도에서 가족과 바닷가에 갔다.” 처럼 시간과 장소, 사람, 사건을 연결해 하나의 경험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도 기억 능력이 있지만 이러한 기억 체계와 관련된 기능은 성장 과정에서 계속 발달합니다.
따라서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은 현재 성인이 사용하는 방식과 똑같은 형태로 저장되고 유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어 발달도 어린 시절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언어 능력도 빠르게 발달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기억할 때 단순히 이미지로만 저장하지 않습니다.
“할머니와 놀이공원에 갔다.”
“빨간 풍선을 샀다.”
처럼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린 시기에는 자신의 경험을 복잡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성장하면서 언어 능력이 발달하면 경험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이 때문에 언어의 발달 역시 어린 시절 기억이 형성되고 장기간 유지되는 과정과 관련된 요소 중 하나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개념도 성장하면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는 단순히 사건만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합니다.
즉, 개인적인 기억에는 자신에 대한 개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존재라는 이해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점차 만들어갑니다.
이러한 자아 개념(Self-concept)의 발달 역시 개인적인 과거를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구성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나의 과거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떠올릴 단서가 줄어든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흐려지는 데에는 시간도 영향을 줍니다.
기억을 떠올릴 때는 여러 가지 기억 단서가 도움이 됩니다.
당시 살았던 집, 자주 가지고 놀던 장난감, 냄새, 음악, 함께 있었던 사람 등이 기억을 불러오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경이 크게 달라집니다.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하고, 장난감은 사라지고, 자주 만나던 사람들과도 멀어집니다.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던 단서를 접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래된 물건이나 노래를 접했을 때 갑자기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도 기억 단서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진짜 내 기억일까?
어릴 때 사진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사진 속 장면이 너무 익숙해서 실제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당시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을 여러 번 보고 가족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들어진 이미지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살 때 놀이공원에 갔던 장면이 떠오른다고 해도 실제 경험에서 남은 기억인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본 사진의 모습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진은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단서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없는 것은 이상한 걸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기억력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아주 어린 시기의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현상입니다.
기억은 단순히 뇌에 정보를 저장하는 능력 하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뇌의 발달, 언어 능력, 자아 개념, 주변 사람들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 등 다양한 요소가 함께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두세 살 때의 하루를 어제 일처럼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어릴 때 기억은 왜 점점 사라질까?
결국 어린 시절 기억이 잘 안 나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는 한 가지 설명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어린 시기에는 기억과 관련된 기능이 계속 발달하고 있으며, 언어와 자아 개념 역시 성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여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경험을 떠올리게 해주는 단서가 줄어드는 것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앨범 속 어린 나를 보면서
“분명 나인데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까?”
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진 속 어린아이는 분명 나지만,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내가 쉽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으로 모두 남아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도 수많은 경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